실패와 난관을 통해 이끌어내는 경험, 성장

개인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물리학자로 성장하여 인류에 큰 업적을 남긴 스티븐 호킹 박사와 어린 시절의 불우함을 딛고 유명 배우로 살면서도 항상 감사할 줄 알았던 배우 오드리 헵번. 그들의 고난과 실패, 성장의 경험을 인천공장 설비팀의 조동식 사우가 만나 함께 이야기 나눴다.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조동식 사우 ▶ 안녕하세요. 인천공장 설비팀 소속으로 산소, 질소, 아르곤 제조공급과 플랜트 운전 유지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조동식 사우입니다.
이번 호 주제는 ‘성장’인데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실수나 실패를 통해 성장의 노하우를 쌓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계와 물리학계에서 불멸의 업적은 남기신 두 분과 함께 성장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오드리 헵번 ▶ 실패와 난관을 통해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사우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 어린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네요. 저는 어린 시절이 불우했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이혼 가정의 아이였어요. 제가 유년을 보낸 네덜란드 아른헴(Arnhem)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도시였죠. 친척들은 총에 맞아 죽거나 강제 추방됐고 먹을 것이 없어 굶기 일쑤였죠. 전쟁이 한창일 때는 늘 침대에 누워 음식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천식과 황달, 영양실조로 전쟁 직후에 168cm 키에 고작 39kg이었는데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셈이에요. 그때의 경험 덕에 저는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삶에 있어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나머지 것들은 케이크에 입힌 초콜릿 같은 것입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을 그런 것들….

스티븐 호킹 ▶ 저 역시 좌절을 겪으며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 전 학자였던 부모님 덕분에 비교적 순탄하게 옥스퍼드 대학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게 문제가 생긴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때였습니다. 맨 처음엔 신발 끈을 묶는 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언어 장애도 생겼고요. 병원 진단 결과,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부르는 희귀한 불치병으로 치료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몸을 움직이는 게 불가능해지고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죠. 처음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의사들은 2년을 예상했지만 저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2년이 지나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남은 제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죠. 전 그때쯤 여동생의 친구인 제인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고 가정을 이뤘어요. 그게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에게 살아가야 할 목적을 주었으니까요. 기적처럼 아이들도 태어났죠. 그러니까 저는 가족의 존재 덕에 루게릭 병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일은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조동식 사우(1970~)
인천공장 설비팀에서 근무하는 조동식 사우는 매일매일 자잘한 실수들을 반복하며 살고 있으며 그것이 조금씩 자신을 완성시켜 나아간다고 말한다.
내일은 오늘의 나보다 더 발전된 모습일 것이라는 기대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기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해 노력한다는 그는 가족의 응원과 사랑이 함께하는 한 자신의 성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실패와 난관을 대하는 자세에서 차이가 생긴다
조동식 사우 ▶ 뜻밖으로 두 분 모두 굉장한 어려움을 겪으셨고 또 그것을 극복하셨군요. 그리고 난관을 극복한 중요한 동기로 가족의 존재를 말씀해주신 것도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실패의 위험이 있더라도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일단 피하고 리스크를 줄이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오드리 헵번 ▶ 저는 두 가지가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합쳐진 거라고 생각해요. 전쟁 후에 운명처럼 저는 런던의 유명한 마리 램버트(Marie Rambert) 발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발레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레리나가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돈이 없었어요. 저는 발레리나 슈즈를 사거나 치과에 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결국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됐습니다.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였죠. 큰 키 때문에 발레리나의 꿈은 결국 접어야 했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경험과 발레 선생님들의 엄격한 지도를 성실히 수행한 경험은 이후 배우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얻고 나서 사람들은 말했죠. “오드리, 내일 하루는 쉬어요. 하루에 16시간이나 연습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전 대답했죠. “아니에요. 내일 오전 9시까지 올게요.” 그리고 다음 날 저는 오전 8시에 연습하러 가곤 했죠. 촬영이 끝나고 무대의 커튼이 내려갈 때야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죠. 이를 통해 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 실패한 발레리나였어요. 하지만 발레의 경험이 있었기에 성공한 배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스티븐 호킹 ▶ 저 역시 실패의 위험이 있더라도 도전하는 것과 때로는 리스크를 피하는 것은 결국 같은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루게릭 병에 걸린 후에야 전 비로소 아주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전에는 저의 천재성만 믿고 연구를 등한시 했거든요. 그러나 불치병과 기적처럼 이룬 가족은 저를 진정한 물리학자로 만들었습니다. 물리학의 난해한 성과들을 수많은 방정식을 이용해 쉽게 풀어쓰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저는 단 하나의 방정식을 사용해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실패에 대한 도전이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책은 전세계적으로 수천만 권이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

“한 손은 자기자신의 성장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
오드리 헵번은 6살 이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고 2차 대전을 겪으며
거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구호기금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불우함을 잊지 않았던 그녀는 매사에 감사하며 살기 위해 노력했고,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열정을 세계 구호 운동에 쏟아 부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제대로 되돌려 줄줄 아는 진정한 스타였다.

함께 하는 성장이 중요하다
조동식 사우 ▶ 저는 개인적으로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가족의 응원을 꼽고 싶습니다. 가족이 있기에 저는 날마다 즐겁게 일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거든요. 끝으로 두 분께서는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어떤 점을 꼽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오드리 헵번 ▶ 저 역시 성장의 원동력은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가정생활은 생각만큼 순탄치는 않았어요.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세상의 모든 가족 역시 행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기아와 질병에 빠진 전세계 어린이들을 도우며 말년을 보냈어요. 저는 ‘제3세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난관을 극복하고 실패에서 경험을 찾으며 다 같이 성장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지요.

스티븐 호킹 ▶ 저는 루게릭 병으로 인해 인생의 가장 큰 난관을 겪었지만 가족의 사랑을 통해 이를 이겨내고 멋진 과학적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전에는 제 자신과 가족에게만 책임을 지면 됐지만 과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전세계인에게 영감을 주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죠. 제가 세상에 내보인 블랙홀 이론도 근사한 성과이긴 하지만 저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도 멋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그에 못지 않은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전 사람의 운명은 실패를 마주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은 함께 성장하는 기쁨입니다. 이는 물론 기업도 마찬가지겠지요.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또 다른 가족이니까요.

취재지원_정복기(인천공장 기자)

“루게릭병 진단 이후 비로소 더욱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천재적인 물리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그는 21살 때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2년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좌절하지 않고 삶에 더 적극적이 된 그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나온 후 나는 갑자기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스스로가 놀랍게도 과거보다 지금 나의 삶을 더 즐기게 되었다.”
읽고 말하고 쓰는 것이 다 어려운 상태에서 이론 물리학의 중요한 업적들을 남기며 인류 과학의 지식수준을 100년이나 앞당긴 스티븐 호킹. 그는 지난 2018년 3월 14일 향년 76세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