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鐵 – 鐵이 만든 한국사 명장면 #3

文史哲鐵(문사철철)
문학, 역사, 철학은 인문학 필수 분야. 현대제철인의 교양과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철로 풀어본 인문학을 연재한다. 이름하여 文史哲鐵(문사철철)!

 

#조선, 세계 유례없는 대량의 금속 활자 사용
조선시대 철은 이미 조상들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농부들은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는 물론,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도 문고리, 자물쇠, 각종 장식물에 철을 썼으며 부엌에는 솥을, 안방에는 화로를 놓고 살았다. 곰방대를 입에 문 할아버지나 장도를 품고 다닌 아낙네에게 철은 늘 몸에 지니는 물건이었다. 16세기부터는 백자에 철로 안료를 만들어 문양을 넣은 철화백자가 고고한 선비들의 안방을 차지했다. 천문관측기인 혼천의,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 세종 때의 발달한 과학기술도 철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다. 허준의 신묘한 침술 뒤에도 철이 있었다. 지금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지만 예전엔 침도 철을 가공해 만들었으니 말이다.

선비들이 손에서 놓지 않는 책자에도 철이 있었다. 조선은 고려 때 발명된 금속활자 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특히 문치에 힘쓰고 아예 글자를 만들어 배포한 세종대왕은 한글 활자를 제작해 수많은 책을 간행했다. 이후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 철활자로 만든 책이 대량으로 인쇄되었다. 당시의 철활자는 무쇠, 즉 주철로 만들었다. 주철은 철 중에서도 성질이 무르고 가장 녹기 쉬우며 상대적으로 주조하기 쉬워 글자의 세밀한 부분을 표현하기에 좋은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활자를 만들어내는 국가 기관은 주자소(鑄字所). 건국 초기인 태종 3년(1403년)에 처음 세워진 주자소는 고려시대 위대한 발명품의 맥을 잇고 크게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철로 만들어 천문을 관측하는 데 사용한 혼천의

태종 초 만들어진 청동활자 ‘계미자’에 이어, 세종 초에는 이를 수정 보완한 ‘경자자’와 ‘갑인자’가 개발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장영실도 이 개발에 참여했으니, 갑인자는 글자 수만 20만 자에 이르고 글씨체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하루에 40장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양의 인쇄를 자랑해 세종대왕은 천문, 역법에 관한 책들을 아주 많이 찍어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서책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철 덕분이었다.

 

#이의립, 걸어서 철산을 조사하다
조선시대는 나라의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국가, 국왕의 소유였다. 때문에 개인이 철산(鐵山)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자칫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위험한 일에 일생을 바쳐 마침내 임금으로부터 광산을 하사 받은 인물이 있다. 바로 이의립(1621~1694년)이다. 칠순을 넘겼으니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장수한 이의립은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나라의 살림이 살아나기 위해선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유황과 농기구, 솥 등을 만들 무쇠가 대량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무려 10년 동안 쇠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철산을 찾아 다니던 어느 날 그는 부모님의 기일을 챙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희한한 꿈을 꾼다. 한 노인이 나타나 ‘십 년을 기다린 일이 문 밖에 있다’는 말을 건넨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보니 까치가 그의 앞을 빙빙 돌았고, 홀린 듯 따라가보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거대한 철산이 눈앞에 있었다. 그곳이 바로 울산 북구 달천동에 자리한 동양 최대 규모의 철광석 광산, 달천철장(달천광산)이다.

이의립은 나라의 살림을 걱정해 평생 철산지를 찾아다닌 끝에 달천철장을 발견했다

본래 삼한시대부터 철 생산지로 유명했지만, 수백 년간 버려졌던 이곳을 이의립이 재발견한 것이다. 달천 지역은 지금도 그 역사와 이의립의 업적을 기리며 ‘쇠부리축제’를 열고 있다. 결국 이의립의 공을 크게 산 당시 임금 숙종은 아예 달천철장을 그에게 하사한다. 이의립의 발견으로 달천철장의 철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막대한 양의 철을 제철소에 공급하며 우리나라 산업 부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현대제철, 21세기 철의 강국을 만들다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을 위해 한반도에 많은 철강 공장이 건설됐지만 그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 세워졌다. 해방 이후 남한에 남은 것은 강원도의 ‘삼화제철’과 인천의 ‘조선이연인천공장’ 두 곳뿐이었다. 이마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공장을 보수하고 재가동하면서 부흥의 실마리를 키워갔다. 삼화제철소는 제선 부문을, 조선이연인천공장을 모체로 설립된 대한중공업공사에서는 제강 부문의 강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압연 부문에서도 삼강제강소, 동국제강 등의 회사에서 철강재를 생산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 철강산업 규모는 크지 않았다.

1960년대 들어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고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나라 철강산업도 대도약을 시작하게 된다. 산업화에서 철강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항만, 도로, 교량 등의 기반 시설에서부터 자동차, 기차 같은 교통수단, 건축물의 골조와 상하수도 배관 파이프, 각종 일상용품 등 철은 현대인의 생활 어디에나 쓰인다. 한 나라가 산업화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철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제철의 모태인 인천제철은 1953년 설립된 대한중공업공사를 1970년에 흡수했다. 이후 1972년 철근공장, 1973년 전기제강공장에 이어 1975년 소형공장의 조업까지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산업 부흥에 절실하게 필요한 각종 철강재를 공급해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을 이끌어온 현대제철은 ‘철, 그 이상의 가치 창조’라는 비전으로 미래를 밝히고 있다

인천제철이 현대그룹에 편입된 것은 1978년의 일이다. 현대그룹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자동차, 조선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대규모 해외건설 공사를 수행하면서 제철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인천제철을 기반으로 연간 10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다. 현대그룹에 편입된 인천제철은 1982년 국내 최초로 대형 구조물의 골조로 쓰이는 H형강을 생산하는 등 대한민국 제철산업의 부흥을 견인했다.

21세기에도 활약은 이어졌다. 2004년 인수한 한보철강공업 당진공장이 ‘10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고 2005년 당진공장과 인천공장이 ‘OHSAS 18001’ 인증을 획득하면서 대한민국 철강산업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2006년 현대제철로 사명을 변경한 뒤 같은 해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기공했다.

쉼 없이 달려온 우리나라 제철산업은 2018년, 7250만톤의 철을 생산해 대한민국을 세계 5위의 철강 강국으로 우뚝 서게 했다. 이는 전세계 생산량의 4퍼센트를 차지하는 양이다. 철은 산업화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인류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재다. 이제 현대제철은 자동차용 초고장력 강판, 고강도 내진용 철강재 등 최고의 가치를 가진 제품에 집중해 대한민국 철의 역사를 더욱 단단하게 써내려 갈 것이다.

「쇠부리토크」 편집팀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식

참고 도서
「재미있는 우리나라 철 이야기」 한국철강협회 철강홍보위원회 홍대한 지음
「철과 함께하는 시간 여행」 한국철강협회 철강홍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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