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鐵 – 鐵이 만든 한국사 명장면 #1

文史哲鐵(문사철철)
문학, 역사, 철학은 인문학 필수 분야. 현대제철인의 교양과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철로 풀어본 인문학을 연재한다. 이름하여 文史哲鐵(문사철철)!

 

#낙랑을 통해 선진 제철 기술이 유입되다
기원전 108년, 중국 한무제는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낙랑군은 이 4개 군 중 하나로, 지금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낙랑은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4백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가 침투하는 기지 역할을 했다. 철 역시 마찬가지. 철기 문화는 낙랑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넘어와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낙랑 지역 무덤의 부장품에는 철기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농기구와 거울, 솥, 항아리 같은 생활용품도 있지만 철제장검, 철도끼, 마차 바퀴를 연결하는 차축 등의 무기류가 대부분이다. 낙랑의 철기들은 모두 단조품으로 한나라 제철기술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단조란 우리말로 ‘방짜’, 즉 금속을 두들기고 눌러 물건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남쪽에선 가야를 중심으로 자생적인 철 기술이 진보했으나 한반도의 많은 지역은 낙랑을 통해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출토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주조철과 강철이 동시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철기 문화 초기부터 중국 서한 이후 발달한 백련강(백 번이나 단련한 단단한 쇠)이 보인다고 한다. 이는 가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낙랑을 통해 유입된 제철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동북아를 지배한 고구려의 鐵기병
고구려는 동북아의 지배자였다. 용맹한 전사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대륙을 누볐으니, 고구려가 그토록 광활한 영토를 가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철이었다. 앞선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철갑옷과 강철 무기로 무장한 철기병은 고구려가 광활한 영토를 가질 수 있었던 힘 중의 하나였다.

‘개마무사’라고도 하는 이들의 철갑옷과 무기는 얼마나 강력했을까? 우선 기병이 입은 갑옷의 무게가 약 20kg, 말의 갑옷이 약40kg 정도 되었다고 하니, 투구와 창까지 생각하면 60kg이 훌쩍 넘는 무게를 통제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는 말이다. 고구려의 철기병은 기동성과 유연성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터라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

그런데 이들의 남다른 기동성과 유연성은 고구려 철기병이 물고기 비늘 모양을 한 갑옷을 입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비늘 갑옷은 적의 화살이 뚫지 못하도록 겹겹이 그리고 촘촘하게 몸을 감싸면서도 활동하기 편한 과학적인 설계를 자랑했다. 이를 만드는 기술도 최고급 단조기술 없이는 불가능했으니, 고구려의 대장장이들은 태왕의 나라를 만든 숨겨진 공신들인 셈이다.

이들은 판갑옷을 걸친 가야나 유럽의 철기병들보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장착, 중국과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고구려의 힘은 철에서 나왔다.

#가야, 철로 뜨고 철로 지다
김수로왕의 나라 가야는 ‘철의 왕국’으로 통했다. 가야는 기원 전후 탄생해 562년 신라에 흡수되어 사라지기까지 낙동강 하류, 지금의 경남 김해 지역 여러 국가들의 연맹왕국이었다. 가야가 탄생했던 기원전 1세기 무렵은 낙랑을 통해 한반도에 철기 문화가 대량 유입되던 시기. 그런데 동시대 아득히 먼 남쪽 지방 가야에서 철기유물과 야철 유적이 대거 등장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철이 대량 생산되었으며 그 문화가 중국을 통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탄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전설에도 ‘철의 왕국’에 대한 힌트가 숨어 있다. 수로왕의 성씨인 김(金)은 곧 ‘쇠’다. 수로왕의 씨족은 철을 다뤘고, 이를 통해 가야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예∙왜가 모두 와서 얻어 갔다. 장사를 지낼 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 대방)에 공급된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 문장 속의 나라가 가야라고 본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낙랑과 대방 지역에서도 중국이 아닌 가야의 철을 사용했다는 것이니, 그 만큼 앞선 제철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선 1세기 무렵의 칼, 창, 화살촉 같은 무기들과 도끼, 괭이, 낫 같은 농기구들이 다량 발굴되었다.

철은 가야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쇠락의 원인도 제공했다. 철은 워낙 탐이 나는 물건인지라, 가야는 늘 전쟁에 시달렸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나해왕 시절, 남해안 일대에 위치한 여덟 부족이 가야의 철 교역 장악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5세기 초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도 받았다. 중원의 지배자는 왜 백제와 신라가 아닌 작은 가야로 갔을까? 이 또한 철 때문이었으니, 가야는 이웃 부족과 고구려, 왜의 잦은 공격에 시달리다 결국 신라와 백제의 협공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철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쇠부리토크 편집팀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식

참고 도서
「재미있는 우리나라 철 이야기」 한국철강협회 철강홍보위원회 홍대한 지음
「철과 함께하는 시간 여행」 한국철강협회 철강홍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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