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러 라쉬가 말하는 자율과 책임의 정비례 법칙

‘비정상회담(JTBC)’, ‘뇌섹시대-문제적 남자(tvN)’ 등 방송에 출연 하면서 유명인이 된 타일러 라쉬(Tyler Rasch). 올해 여름 서울대학교 외교학 석사를 마치고 지금은 친환경관련 제품을 연구 개발하는 회사에 취직한 어엿한 직장인이다.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능력, 시카고대학교 출신, 서울대학교 석사 등 세간에 알려진 그의 이력은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하지만, 그는 사회와 환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더 나은 삶을 가꾸기 위한 일에 일조하고자 하는 확고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의지의 청년이란 점에서 더욱 매력적인 사람이다. 어학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한국에서의 유학, 직장인으로서의 생활까지 모든 과정이 오롯이 자율적 선택이었다는 타일러 라쉬. 그에게 있어 자율과 책임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 나눠보았다.

Q. 방송 출연 이전과 이후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개인적 자유가 없어져 힘들거나 불편한 점은 없는지?

이미 익숙해졌다.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알아봐줘서 고맙고 좋은 일이 더 많다. 동네 오빠나 옆집 아들 같이 생각하시는 것 같다. 엄청 잘생겼거나 혹은 부담스러운 캐릭터를 가졌거나, 특별한 이력을 가진 것은 아니니 말이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 경우 간혹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을 종종 겪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면에서 자유로웠다. 다만 힘들었던 것은 학생신분으로 방송 일을 하면서, 활동 공간이나 영역의 폭이 확 좁아졌다는 점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아예 멀어지거나 더 가까워지거나 하면서 많이 정리되었다. 그런 변화들에 익숙해지는 것은 좀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 매우 다양한, 여러 가지 모습을 갖고 사는데, 방송출연을 하다 보면 시청자 분들이 기대하는 어떤 모습이 있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이미지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Q. 석사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방송을 하거나 아니면 박사과정을 밟게 될 줄 알았다. 직장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그런 맥락과 상통하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밟았으니 당연히 이 길로 가야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원하니까 맞춰 살아야지’ 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나는 방송 일을 좋아하지만 그것을 본업으로 삼아 내 미래를 맡기기엔 불안정했고 또 내가 목적한 삶과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속 빈 강정 같은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물론 방송 일을 하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수십 년간 몰입할 수 있는 일을 할거면 방송보다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싶었고 그래서 평소 환경에 대한 내 관심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Q.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직원 10여 명 정도의 작은 스타트업(start up) 회사다. 취지를 설명하자면, 우리는 지금 제품을 만드는 과정과 소비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다. 그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친환경적인 솔루션을 기획하고 제공하는 회사이다.

Q.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자율과 책임의 한가운데서 고민을 하게 된다. 타일러씨가 생각하는 자율과 책임,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을까?

100퍼센트 자율적인 업무방식이 존재한다면 책임 또한 100퍼센트 져야 한다. 자율과 책임의 관계는 정비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율성이 높을수록 책임지수도 높아지고 낮을수록 책임지수 역시 낮아지는 것이다.
자율적 권한을 주려 한다면 책임에 관한 철저한 전략과 계획을 설계해야 한다고 본다. 책임에 대한 설계 없이 자율적 권한만 부여 한다면 목적한 성과를 달성하기 어렵고, 또한 자율성 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책임만 강요한다면 업무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 대학생들은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점수 맞춰서 대학을 가거나, 또는 부모님이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물론 일부 학생들이겠지만, 이런 선택에 책임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인생인데도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해 사회에 나온 사람이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책임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일이 잘못되면 부모님 탓을 하거나 환경 탓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Q. 자율이 주어지면 그만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두렵지는 않는지?

나는 책임에 대한 공포보다 그렇게 안 하는 것에 대한 불행과 답답함이 더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그런 결과로 내 자신이 싫어지는 것이 더 싫다. 그래서 책임을 감수하는 것을 즐긴다. 그 과정을 즐기고 싶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과정의 성취감은 내 몫이니까 말이다.

Q.그런 성향은 미국인의 특성인가? 본인의 성격인가?

고집이나 책임의식은 타고 난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인의 특성 은 아니다. 환경적인 요인이 큰 것 같다. 내 고향 버몬트 주에는 남들이 하는 대로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문화가 있다. 버몬트 주 자체의 자율성을 잘 드러내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미국에서 최초로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 돌아가는 도시가 된 것도 그렇고, 1777년에 공화국을 따로 만들었던 역사도 그렇다. 1776년 미국이 건국된 후 뉴욕 주와 뉴햄프셔 주가 버몬트 주의 땅을 갖기 위해 따돌리며 로비를 했지만, 버몬트는 굴하지 않고 공화국을 만들어버렸다. 당시 만든 공화국 헌법은 오늘날 버몬트 주 헌법의 기초가 되었고, 거기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노예제 폐지 내용까지 있었다.
얼마 전에도 유전자변형식품이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표시 라벨을 부착해야 한다는 버몬트 주의 요구를 기업들이 거부하며 버몬트 주를 고소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결과는 버몬트 주가 이겼다. 버몬트 주는 이제 미국에서 최초로 유전자변형식품 표시 라벨을 부착해야 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Q.그러한 지역적 특색이 교육 과정에서도 배어있었을 것 같다.

교육의 영향이 컸다. 우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영문 수업에서 반복적으로 배우는 시가 있다. 퓰리처상을 네 번 이나 수상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다. ‘숲 속의 두 갈래의 길 중 나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데, 버몬트 주가 무엇에 중요한 가치를 두는지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시다. 프로스트 역시 버몬트 주 출신 작가이다. 내 고집과 집착이 타고 났다고 해도 아마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세계관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Q. 한국으로 유학 오는 일에 대해 부모님의 이견은 전혀 없었나?

물론 없었다. 내 선택이니 지지해 주셨고, 대신 어머니는 꼭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늘 다른 세상을 많이 경험해 보기를 권해 주셨다. 학부에서 국제학을 전공했던 이유도 언어에 대한 내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분야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 등을 공부할 수 밖에 없고, 이런 분야를 공부한 것이 지금은 세상을 알아가고 사회 생활을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Q. 끝으로 현대제철 사우 여러분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나는 아직 겪어야 할 일들이 많고 그래서 두려움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하지만 이방인으로서 나는 제약이 많다. 여러분들은 나보다 이로운 환경에서 조금은 수월하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 한국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미국도 예상치 못한 대선의 결과로 인해 한국 국민과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대를 함께 겪는 청년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 하자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이 촛불 시위이든, 공부이든, 회사 생활이든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이 옳은 선택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성숙한 지성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타일러 라쉬 (tyler Rasch)
올해로 한국생활 5년 차에 접어든 타일러 라쉬, 1988년 미국 버몬트 주 출생으로 시카고대 국제학부 학사를 마쳤다. 2008년 여름방학 때 이화여대 어학당에 다니며 어학연수를 했고 졸업한 뒤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으로 일하며 한덕수 대사를 도운 이력이 있다. 2011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에게 지원한 정부초청장학을 통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고 올해 외교학 석사를 마쳤다.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며 특유의 합리적이고 냉철한 지성미를 발휘해 눈길을 끌었고 직지심체요절을 돌려 주지 않는 프랑스를 강하게 비판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타일러. 지금은 환경관련 회사에 취직한 직장인이 되었고 동시에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