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는 어려워

갑자기 다가온 초여름 날씨가 물러가고 부슬부슬 비가 떨어지는 추운 아침,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옥현리 노인정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배지와 풀칠기를 승합차에 싣고 온 도배 전문가 2명이 짐을 나르고 고무통에 풀을 부어 준비하는 사이, CSR추진팀을 이끄는 고선정 사우와 오민정 사우가 도착했고 이어 당진제철소 냉연지회 노조 간부 5명이 한 차를 타고 도착했다.

오늘은 옥현리 노인정의 도배를 하는 날이다. 지어진 지 30년, 깨끗하게 관리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었던 노인정의 벽과 천장을 깔끔하게 새 단장하기로 했다. 회색 실크 벽지는 노인정 어르신들이 직접 보고 골랐다고 한다. 회색 벽지와 체리색 몰드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

 

도배 준비는 액자 떼고 안마의자 옮기는 것부터
전문가들이 나눠주는 솔, 헤라, 칼 등의 각종 도구를 각자 허리에 차고, 흰 목장갑을 끼고 일이 시작되었다.

일단 낡은 벽지를 다 뜯어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벽에 걸려있는 시계, 창문의 블라인드, 액자 등을 떼야 한다. 방은 총 4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거실 벽에는 역대 노인정 회장님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건강하게 노인정 활동을 즐기시는 분도,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다. 그런 액자들을 다 떼어내고, 벽지를 북북 뜯어내고, 창가나 콘센트 근처에 남아있는 작은 벽지 조각들도 섬세하게 칼로 긁어내는 동안, 자동 풀칠기는 풀 묻은 도배지를 토해냈다.

이날 당진제철소 냉연지회와 CSR추진팀이 한마음으로 도배 작업을 마쳤다

천장의 전등과 보일러 스위치 등의 전기 작업이 필요한 부분은 냉연지회 사우들이 간단히 조작하여 떼어냈다. 가장 큰 힘을 쓴 것은 안마의자. 도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안마의자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해야 하는데, 무거워 최소 2명이 붙어야 했다.

 

천장 도배는 아무나 하나
준비가 끝나고 천장부터 본격적인 도배가 시작되었다. 발 받침에 올라가 도배지를 척척 붙이는 전문 도배사를 보고, 두 번째 벽지부터는 이충범 수석이 올라가 붙여본다. 그러나 보기보다 쉽지 않다. 몇 번을 해보지만 쭈글쭈글한 상태로 자꾸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배지 밑에서 “이거 장난 아니네?”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좀 더 키가 큰 백인국 사우가 올라가 돕지만 둘이 해도 역부족. 3차 시도에는 박택병 사우와 우범석 부지회장이 나서보지만 이들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왜 도배지는 천장에 곱게 붙지 않고 자꾸만 떨어지는가? 결국 난도가 높은 천장 도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냉연지회 사람들은 벽 도배에 집중하기로 했다.

 

벽도배는 성공!
이충범 사우와 백인국 사우 조는 벽 도배에 투입되었다. 첫 번째 벽지를 붙이는 데 약간 고전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속도가 난다. 결국 안방의 한쪽 벽면 도배를 20여 분 만에 끝냈다. 천장에 전등과 소켓을 달고 불이 들어오게 하는 것도 냉연지회의 몫이었다. 정상만 지회장과 사우들은 뜯어낸 벽지들을 모아 처리를 했다.

서울에서 준비해온 캔커피와 경주빵을 나눠 먹으며 고픈 배를 채우기도 했다. 한창 일하고 있을 때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안방 벽에 기대 앉아 노조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노인정이 달라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옥현리 이장님과 고대면사무소 직원들은 아침부터 나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인사하고 고마워했다. 회의가 있어 간다고 아쉬워하면서 다른 일도 계속 같이 하자고 손 꼭 붙잡고 약속했다.

 

사회적 책임을 나누는 노조의 봉사활동
당진제철소 냉연지회의 노인정 도배봉사는 2017년부터 시작된 H-USR(Union Social Responsibility)의 일환이다. 노조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취지에서 회사가 도입했고, 이에 노조들이 화답하면서 이루어졌다. 그간 CSR추진팀에서 내려가 노조 간부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고 지금까지 3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회사의 전국 공장별 5개 노조(인천공장, 포항공장, 당진제철소, 당진냉연지회, 순천공장)에서 모두 참여하고 있는데 당진제철소와 당진냉연지회는 올해부터 합류했다.

박택병 정책기획부장, 우범석 부지회장, 이충범 수석, 백인국 조직부장(왼쪽부터)

그간 포항공장에서는 지역활동센터 한 곳을 정해 그곳 아이들이 원하는 장소로 함께 나들이 하고 식사와 레크리에이션을 즐겼으며, 순천공장에서는 연탄봉사를 했다. 당진지회에서는 지난 달 저소득 어르신들을 위한 안전물품(가스차단기, 소화기 등)을 구비해 드리고, 방충망을 설치했다. 또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아드리기도 했다. 당진냉연지회는 지난 달에 고대면의 유기견 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앞으로도 고대면과 관계를 맺고 꾸준히 도움을 줄 예정이다.

CSR추진팀 고선정 사우는 “노조는 의사결정을 신중하게 하지만 한번 발을 디디면 빼지 않는 분들이죠”라며 모두들 봉사활동에 호의적이라고 말했다.

 

농구와 야구를 좋아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는 당진제철소 냉연지회 백인국 사우는 봉사용 조끼 사이즈가 작아서 사진을 찍는 내내 꽉 낀다며 수줍어했다.

Q. 당진제철소 냉연지회는 올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어떤 계기로 참석하게 되었나요?
본사에서 당진제철소를 방문해 H-USR을 설명하면서 함께 하자고 하셨어요. 노동조합이 사원복지, 임금투쟁만 하는 건 요즘 시대적 요구와 맞지 않다는 말에도 수긍이 갔죠. 저희가 당진 지역의 어려운 일을 돕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첫 봉사활동으로 고대면의 유기묘, 유기견 센터에 직접 만든 수제간식을 들고 가서 개들을 산책시켰어요. 매스컴에서 봤을 때는 그냥 사람들이 개를 많이 버리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 개들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그런데도 사람이 오니까 너무나 반기면서 좋아해서 유기견과 유기묘를 키우려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H-USR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었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혹시 민폐나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은 했죠. 하지만 해보니까 보람이 커요. 노사화합의 매개로 봉사활동이 좋은 것 같아요. 교섭기간 같은 때는 바빠서 힘들겠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계속 참여할 예정입니다.

Q. 노조활동과 H-USR 활동 서로 다른 활동을 해보시니 어때요?
사람들이 노조활동을 임금 문제나 복지 문제로 국한해서 생각하지만 노조활동 중 중요한 활동이 조합원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상담하고 해결해주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노조활동이나 봉사활동이 다르지 않죠. 사람을 대하는 업무이고, 고충을 해결해주는 일이잖아요. 저는 봉사활동이 노조활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하고 싶은 봉사활동이 있다면?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어르신들 도와드리는 것도 보람되지만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놀아주고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쇠부리토크> 편집팀
사진 김지원(안테나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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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1. 아주 잘생겼습니다….^^노조활동과 usr활동 더욱더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