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의 고통과 열정의 원천, 멕시코시티

멕시코시티는 아스텍 왕국 시절 수도로 지정된 이후 에스파냐 제국을 거쳐 현재까지 멕시코의 수도 역할을 해왔다. 유장한 역사 덕에 라틴아메리카 문명의 핵심지역으로 꼽히며, 멕시코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아우른다.
이 도시에서 멕시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프리다 칼로가일생을 보냈다. 고통의 크기만큼 강렬한 삶을 살았던 화가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 묻어 있다.


<두 명의 프리다> 이혼의 아픔을 그린작품으로 현재의 고통 받는 자아와과거의 행복했던 자아를 표현한다.


<뿌리> 남편을 평생 자연의 품처럼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품. 소더비경매에서 560만 달러에 팔렸다.

고통의 씨앗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의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불운은 여섯 살이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에 생긴 기형으로 시작됐다. 비록 신체적 장애가 있지만 총명하고 영특했던 소녀는 국립 예비학교에 다니던 중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온 몸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사고 후유증으로 의사 대신 화가의 삶을 택한 칼로는 저명한 민중 벽화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rea)를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리베라의 바람기는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처제와 불륜을저질러 칼로에게 형용하기 어려운 충격과상처를 주었다. 그 와중에 육체적으로는 서른 번이 넘는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세 번의 유산을 겪은 후 간절히 원했던 아이도 낳지 못했다. 칼로는 반복되는 잔인한 운명과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응시하며절망과 우울을 이겨냈다. 자신이 감당해야했던 아픔과 괴로움을 독특하고 기괴한 오브제로 치환해 캔버스 위에 펼쳐놓았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수사가 이보다어울릴 수 있을까.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칼로와 저명한 민중 벽화 화가인 남편디에고 리베라.


멕시코시티의 대표 명소 중 한 곳인국립예술궁전.

프리다 칼로의 처음과 끝 코요아칸
코요아칸(Coyoacán)은 고급 주택가와 공원, 다양한 문화시설이 갖춰져 있어 살기 좋은 지역으로 꼽히며 멕시코시티 중남부에 있는 자치구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교외 마을을 찾곤 하는데 그 이유는 단연코 프리다 칼로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그녀의 인생을 엿보기 위해 ‘파란 집(La Casa Azul)’ 으로 향한다. 칼로는 아버지가 지은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고 리베라와의 이혼과 재결합을 거치며 다시 파란 집으로 돌아왔다. 정원을 가꾸고애완동물을 길렀으며, 운신의 폭이 줄어들자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미술을 가르쳤다. 계속된 건강 악화로 움직일 수 없는 와중에도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그렸는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침대에 누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멕시코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 침대에 누운 채로 참석한 일화는 그녀의 열정적인 삶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무렵이 칼로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기였을 거라는 해석도 많다.
이듬해인 1954년 7월 13일, 프리다 칼로는 4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 걸출한 예술가의 시작과 끝을 품어준 파란 집엔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코요아칸 밖에도 많은 프리다 칼로가 있다.
돌로레스 올메도 박물관에서는 <부러진 기둥>, <헨리 포드 병원> 등의 대표작 25점을 감상할 수 있고, 멕시코 현대미술관에 들르면 <두 명의 프리다>를 마주하게 된다. 한때 프리다 칼로 부부가 살았던 집을 개조한 산 앙헬의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스튜디오 박물관,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열린 근대미술관, 멕시코 문화예술의 상징이자 프리다 칼로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던국립예술궁전도 프리다 칼로의 흔적이 녹아있는 곳이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 칼로의 초기작들과편지, 화구들과 가구들이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