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세 늦깎이 작가의 삶과 그림 이야기
그림 작가 이재연

햇볕이 잘 드는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면 아이들 장난감과 함께 창가에 세워둔 풍성한 다육 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깥 창으로 시선을 돌리면 베란다를 빼곡히 에워싸고 있는 각양각색의 다육 식물들에 입이 떡 벌어진다. 71세 나이에 그림 작가로 데뷔한 이재연 할머니가 생활하는 공간이자 작업실이 바로 이곳이다.

그림책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소동출판사)」는 올 초 발간된 이재연 작가의 첫번째 책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그린 60여 편의 그림과 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시간순으로 그려냈다. 가난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아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자신을 바친 이재연 할머니가 70세에 처음으로 그림을 시작해 하루도 빠짐없이 그린 작품들이 모여 책으로 발간됐다.

아직은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다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이재연 작가는 우리네 엄마, 할머니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젊어서는 오빠와 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에게 헌신하며 자신은 늘 뒷전이었던 수많은 엄마 중 한 명이 이재연 작가였다. 할머니 작가에게 뒤늦게 운명처럼 찾아온 그림이라는 행운은 그래서 참으로 소중했다.

이 작가가 처음으로 그림을 접하게 된 것은 취미로 키우던 다육 식물의 화분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다. 다육 식물의 매력에 빠져 처음엔 도자기 화분을 만들다가 점차 화분에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숨겨져 있던 그림에 대한 열망과 재능도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이 작가 그림의 단골 소재 중 하나도 역시 다육 식물이다. 다양한 모습의 생명력 넘치는 다육 식물들을 참 많이도 그렸다. 최근에 집중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17개월 손자의 그림 일기이다. 늦둥이로 태어나 온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손자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애정 넘치는 시선으로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보살피고 키우는 것에 보람을 갖는 할머니 특유의 감성이 깊게 베여서 일까? 이 작가의 작품에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 내내 겸손한 말투와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는 이재연 작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만나보자.

 

Q. 어떻게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멋진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사느라고 일체 나에 대한 투자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며느리의 추천으로 도서관도 가고 행복센터라는 노인을 위한 교육 기관에도 나가게 되면서 그림을 시작하게 됐죠. 처음에는 도자기 만들기를 시작했어요. 도자기를 만들다 보니 예쁜 꽃도 그려야겠고 멋진 풍경도 그려야 했어요. 그래서 그림 그리는 동아리에 참가하게 됐고 그때부터 4B 연필을 쥐고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Q. 책을 발간하게 된 계기는요?
교하 도서관에서 열린 ‘기억의 재생’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소동출판사의 소동님이 강연을 하셨어요. 그 강연을 들으면서 글로는 표현을 못 하겠는데, 그림으로는 표현을 잘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한 점, 한 점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그림을 보시고 소동 출판사에서 ‘책을 한 번 내보지 않겠냐’고 출판 제의를 하셨죠.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고향과 어린 시절 뛰어놀던 추억들을 되살려서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Q. 책과 함께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도 소개해주세요.
2017년 7월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60여 점을 모아서 책을 출간하게 됐어요. 책 제목은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에요.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유황 온천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유황 냄새를 많이 맡아서 쓰러졌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그린 목욕탕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이 그림이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높았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기에 그린 작품인데 홍대거리 전시에서 이 그림을 사겠다는 분도 있을 정도였죠.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은 어머니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11남매를 낳고 키우신 어머님은 매달 초사흘만 되면 장독대에 떡시루를 올려놓으시고 기도를 하셨어요. 아직도 그 모습이 늘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콩타작을 도리깨로 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어요. 이 그림을 보면 어린 시절 엎어 주시던 그 넓고 따뜻했던 아버지의 등이 떠오릅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콩타작을 하고 계실 때 언니랑 제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저를 혼내려고 쫓아오셨어요. 혼나기 싫어서 도망쳤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아버지가 참 많이 보고 싶더라고요.

Q. 책 출판 후 주변은 어떤 반응이었나요?
책이 예쁘고 좋다고들 하세요. 제 그림이 각자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공감거리가 되는 것 같아요. 또 여러 번 봐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죠. 제가 살아온 추억을 기록하고 싶어서 시작을 한 일인데, 의외로 많은 독자가 사랑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Q. 그림의 세부묘사들이 훌륭합니다. 과거의 모습은 어떻게 표현하세요?
기본적인 풍경과 건물은 추억을 되살려서 그릴 수 있어요. 농기계나 제품명처럼 소소한 이미지들은 인터넷에서 검색을 통해서 찾아보고 꼼꼼하게 그려 넣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연습 스케치를 먼저 해서 구도를 미리 잡아 가장 좋은 구도가 나오도록 합니다. 먼 곳은 작게, 가까운 곳은 크게 그리는 기본적인 거리감은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을 통해 배워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때 배운 기본기가 참 도움이 많이 됩니다.

Q.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삶은 어땠나요?
충남 예산온천이 내 고향입니다. 아주 깊은 시골은 아니었는데 6.25 전쟁 직후라서 사는 것이 불편하고 입고 먹도 많이 부족했어요. 전기도 중학생이 된 후에나 들어왔을 정도였죠.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쁘셔서 어려서부터 자립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왕복 1시간이 넘는 등하굣길은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확인하게 해줬어요. 봄이면 초록색 들판을, 가을이면 노란 벼 이삭을 보면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죠. 고집을 부려 대전 여고에 어렵게 입학할 수 있었지만 대학은 형편이 안 돼서 진학하지 못했어요. 대신 조폐공사에 취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직장이었던 것 같아요.

Q. 학창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꿈인 것 같아요. 큰오빠가 충남대학교 법대를 나왔는데, 고등고시 시험을 보면 1차는 되고 2차는 안 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게 됐어요. 도대체 그게 왜 안될까?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게 되어서 그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Q. 주부로 살다가 작가라는 직업을 얻은 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노후에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 풍족합니다. 자기개발을 위한 적기도 이때라고 생각해요. 자식들 다 키워 놓고 가사일만 할 때에는 무료해서 다육이와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그런데 그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연필을 먼저 쥐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이렇게 할머니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여주니 살아있는 교육이 저절로 되는 것 같아요. 손녀가 예쁜 책이 나온 것을 보고 학교 선생님께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참 뿌듯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럽지만, 이분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모범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Q. 꿈을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젊은이들에게 자기가 현재 생활하고 있는 것들을 열심히 기록하고 꿈을 키우다 보면 나처럼 늦게라도 꿈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어요. 현재 자기가 하는 일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메모 형식으로라도 꾸준하게 적다 보면 충분히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후에 이런 취미가 없다면 정말 무료할 수 있는데, 미리 노력해 놓으면 삶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다육 식물은 키우기가 쉽지 않아요. 분갈이를 해줘야 하고 물도 잘 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다육식물의 특성과 기르는 방식을 알려줄 수 있는 다육 식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 다육 식물 그림을 묶어서 책을 내보고 싶어요.

또 늦둥이 손주가 너무 예뻐서 손가락, 발가락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어느새 스케치북이 제법 많아졌어요. 단계 단계 변하는 손자의 모습을 엮어서 그림 일기책도 내고 싶습니다. 5년 후에는 정말 수작들을 많이 그려서 개인전도 열고 싶고요. 건강이 허락한다면 계속해서 90살, 100살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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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7
  1. 먼저 축하 드립니다. 저도 작가님을보고 용기내서 도전해 보겠습니다. 아자아자^^

  2. 그림 작가로 제2의 삶을 멋지게 살고 있는 이재연 작가님! 새로운 꿈을 현실로 이루어낸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되네요

    1. 쇠*** 댓글:

      안녕하세요? 쇠부리토크 편집실입니다. 제2의 삶을 멋지게 살고 계신 이재연 작가님께 응원의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talk@hyundai-steel.com로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작가님이 예쁘게 작업하신 소중한 싸인 책을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3. dre*** 댓글:

    할머니 작가님의 따뜻한 마음 잘 느꼈습니다. 하루가 포근해지는 듯한 느낌이에요.
    언제부터인가 나이 때문에라는 말이 계속 나오더군요. 어디를 가려고 해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해도, 누군가를 만나려고 해도… 하지만 할머니 작가님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이 때문이 아니라 제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처럼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1. 쇠*** 댓글:

      안녕하세요? 쇠부리토크 편집실입니다. 할머님의 따뜻한 마음에 대한 응원 감사합니다. talk@hyundai-steel.com로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작가님의 삶이 녹아든 소중한 싸인 책을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4. how*** 댓글:

    월요일 아침, 정말 새롭게 충전되는 기분입니다. 누구나 새롭게 즐겁게 배우고, 느끼고,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시네요.
    누군가에게 가장 잘 알려 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 새삼 기억납니다. 항상 응원할게요~

    1. 쇠*** 댓글:

      안녕하세요? 쇠부리토크 편집실입니다. 작가님께 응원의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talk@hyundai-steel.com로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작가님이 싸인하신 책을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