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鐵(문사철철)
문학, 역사, 철학은 인문학 필수 분야. 현대제철인의 교양과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철로 풀어본 인문학을 연재한다. 이름하여 文史哲鐵(문사철철)!

항해술의 발전 등으로 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승리의 여신은 더 뛰어난 철을 가진 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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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검, 십자군 전쟁의 성패를 가르다
11세기말에서 13세기까지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유럽과 이슬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바꿔놓았다. 다마스커스 검은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인 이 대규모 싸움의 명운을 가르는 데 일조했다. 특히 3차 십자군 전쟁(1188~1191년) 때 유럽의 십자군은 다마스쿠스 검을 앞세운 살라딘 장군의 전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갑옷과 검 등 자신들의 중무장은 물론 돌까지 단숨에 잘라버리는 전설의 명검 앞에 그야말로 혼비백산. 수백 년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의 여신은 누구보다 강한 철을 가진 자에게 미소 지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다마스커스 검의 위력이 서방 세계에 알려졌다

사실 다마스쿠스 검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십자군 전쟁이 아니었다. 다마스쿠스 검의 원산지는 인도다. 무역 중심지였던 시리아 다마스쿠스 지역을 통해 이 검이 퍼지면서 다마스쿠스의 검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다마스쿠스 검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사산 왕조 시절(226~651년)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 큰 역할을 했다.

우츠 강철, 또는 다마스쿠스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다마스쿠스 검은 부분마다 제작 방법이 달라 독특한 물결무늬가 그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등장한 지 천 년이 넘은 이 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점이다. 강하지만 깨지기 쉬운 탄화철인 시멘타이트와 유연한 철을 합성한 것이라는 설이 있고, 철을 제련할 때 작은 도가니에 쇠를 넣은 뒤 오븐에 넣고 굽던 페르시아 지역에서 우연히 강도 높은 철을 얻었다는 주장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주장 중에서 확실한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

부분마다 제작 방법이 다른 다마스커스 검의 표면에는 독특한 물결 무늬가 그려진다.

#철, 잉카 문명을 무너뜨리다
십자군 전쟁과 더불어 대항해의 시작은 제각각 발전하던 문명이 충돌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후 유럽의 침략자들은 이 새로운 대륙에 눈독을 들여 스페인은 남미로 진격해 찬란했던 잉카 문명을 몰락시켰다.

1532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겨우 168명의 병사를 이끌고 오늘날의 페루, 볼리비아 지역인 남아메리카 중앙 안데스 지방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8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잉카 문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잉카 문명은 화려함과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해발 3,399m 고지대에 마치 테트리스 오락처럼 거석을 쌓아 올린 수도 쿠스코의 위엄은 경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잉카의 8만 대군은 200명도 안 되는 유럽 병사들의 공격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스페인 병사들은 총, 균, 쇠의 힘으로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다. ⓒShutterstock.com

1997년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이유에 대해 저서 「총, 균, 쇠」를 통해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찬란한 잉카 문명이 한 줌의 스페인 병사들에게 허탈하게 무너진 건 총, 세균 그리고 쇠(철)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많은 나라들은 철을 광범위하게 사용해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대양 건너편 아메리카 대륙은 철기의 수혜를 입지 못했다. 대포와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군에게 곤봉과 도끼를 손에 든 잉카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유럽 병사들을 통해 퍼진 페스트와 천연두는 수많은 잉카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두 문명의 역사적인 충돌에서 승자는 이번에도 철을 가진 이들이었다.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고 얻은 권력과 부는 결국 피사로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Shutterstock.com

#송나라, 제철 국가로 번성하다
“송나라는 인류의 삶에 가장 적합한 왕조다. 만약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중국의 송나라 시절로 돌아가 살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종이를 제외한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 이미 석유의 사용법을 알아내 메탄가스와 천연가스를 시추한 나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환하게 빛나던 수도 개봉의 풍경으로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나라. 이 나라가 바로 송나라다. 또 한 가지 송나라의 놀라운 점은 석탄을 코크스로 만들어 땔감으로 사용하면서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중국은 유럽보다 거의 7백 년이나 앞서 코크스를 사용하게 됐다. 숯보다 발열량이 큰 코크스를 발견한 덕분에 11세기 송나라 때는 충국의 철 생산량이 사상 최고조에 달했다. 송나라 기록에 의하면 1078년 한 해에만 무려 12만5천 톤의 철을 생산했다고 한다. 이는 18세기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체의 1년 철 생산량보다 많은 양이었다.

송나라는 이렇게 철로 화폐를 만들고 농기구와 각종 생활용품도 자유자재로 만들어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돌로 만드는 사찰의 탑도 철로 제작해 세웠다. 중국 후베이성 당양에 있는 옥천사의 ‘당양옥천사철탑’은 중국 4대 철탑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답다.

중원의 패권 역시 더 뛰어난 철제 무기를 가진 나라에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송나라에도 약점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철제 무기 제조술이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송나라는 철제 무기로 북방의 유목민들과 싸웠는데 송나라에서 전파된 제철 기술로 무기를 만드는 데 힘 쏟은 거란과 여진이 어느새 송나라의 철제 무기를 추월한 것이다. 결국 남쪽으로 밀려난 송나라는 1279년 몽골족에게 대륙을 내주고 만다. 철을 누구보다 빠르고 널리 활용했지만 이를 무기로 만드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 왕조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쇠부리토크」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