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마운드를 호령했던 ‘대성불패’의 주인공 구대성. 야구팬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다.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시드니 세계 선수권 대회 동메달 결정전 한일전에서 팀을 승리로 이끈 승부사의 모습은 지금까지 레전드로 꼽힌다. 코로나19가 강타한 상황 속에서 지치고 힘든 지금 ‘대성불패’의 신화가 더욱 반가운 이유는 역시 꺼지지 않는 승리의 신화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불패 신화’라는 말이 있다. 한 번도 지거나 실패하지 않은 상황을 신화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늘 이기는 게임을 하기가 쉽지 않다. 프로의 세계인 스포츠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런데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불패’라는 수식어로 표현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前 한화 이글스 선수 구대성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2000년 시드니 세계 선수권 대회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의 장면을 떠올린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지금까지 선발로 등판해 9회까지 무려 155구를 던지며 완투승을 거둔 사나이. ‘대성불패’라는 별명이 당연하다는 듯 그는 이 경기에서도 마운드를 책임지며 각본 없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활약 덕분에 우리나라는 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 사상 첫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고 그날의 환희와 감동은 2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도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다.
언택트 시대에 맞게 쇠부리토크 최초의 화상 통화로 이루어진 인터뷰.
위력적인 강속구와 칼날 같은 제구력을 보여주며 ‘대성불패’ 신화를 이룩한 투수, 구대성. 그의 불패 신화를 더는 마운드 위에서 볼 수는 없지만 그는 멀리 호주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KBO, NPB, MLB, ABL 4개 리그에서 20년 넘게 활약한 야구 인생을 총정리한 <구대성은 지지 않는다>라는 에세이를 펴낸 것이다. 반가운 근황과 함께 지치지 않는 도전 정신에 대해 직접 만나서 듣고 싶었으나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상 인터뷰는 영상 통화로 진행되었다. 사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호주의 불안정한 네트워크 환경 탓인지 줌, 행아웃 등 화상 회의 프로그램 연결이 계속해서 실패하여 세 시간 넘는 실랑이 끝에 간신히 핸드폰 영상 통화 앱을 통해 만남이 성사된 것. 그조차 쉽지 않아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하울링 현상으로 몇 차례나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거는 과정이 반복됐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선수 요기베라의 명언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2006년 WBC 1회 대회가 열린 미국에서 한화 이글스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
Q. 한국프로야구에서 은퇴하고 호주로 건너간 후 근황을 알기가 힘들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모두 비슷한 상황일 것 같아요. 코로나19로 인해 움직이기 힘드니까요. 그래도 호주는 한국보다 상황이 나은 편이라 최근에는 확진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통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요. 로컬 팀에서 아마추어 야구도 즐기고 호주 유소년 대표팀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 언론을 통해 ‘대성불패’ 구대성이 호주에서 전단지 알바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야구팬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던 일이 있다. 구대성은 전단지를 돌리며 서너 시간 파트타임 알바 겸 조깅을 겸했다고 했다. 그는 호주 생활에 적응하며 이런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감사할 뿐이라고 책에서 밝힌 바 있다.)
Q. 선수 시절 한국∙일본∙미국∙호주 4개국에서, 마흔이 넘어서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는데요. 그 수많은 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와 시드니 세계 선수권 대회 3, 4위전에서 선발로 던졌을 때죠. 그리고 2006년 WBC에서 김인식 감독님과 경기했을 때를 꼽을 수 있겠네요.
Q. 반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선수 시절 아쉬웠던 순간도 있나요?
야구선수로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경기는 없습니다. 단지 다시 돌아가서 경기를 한다면 그때보다 더 잘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네요.
호주 시드니 블루삭스 지역의 유소년들을 위하 정기적으로 야구를 지도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Q.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고 갑작스레 호주로 떠났는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처제가 호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호주에서 프로리그를 시작한다고 알려주더군요. 호주와 미국 메이저리그가 손을 잡고 6개 팀으로 프로야구를 출범하는 거였죠. 호주 야구협회에 ‘나도 뛰고 싶다’는 공문을 보내 흔쾌히 승낙을 받았습니다. 2년만 뛸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그는 은퇴 기자회견 당시 부상에 시달려 수술도 하고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30년을 야구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동료와 팬들에게 가장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Q. 호주에서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걱정은 없으셨나요?
두려움은 없었어요. 어느 나라에 가건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거니까요. 미국과 일본에서도 활동을 해봤기 때문에 호주에서 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봤거든요. 프로라면, 아니 다른 분야 역시 자신이 담당하는 종목이라면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과 의사소통 할 때마다 영어는 부족해도 진심으로 다가가서 야구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니 제스처나 말 한마디에도 다 통하더군요.
2009 시즌, KBO와 한화 이글스를 떠나던 날.
Q.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2018년 질롱 코리아 감독을 맡았을 때 시즌 최종전에서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1이닝을 소화했었는데요. 50세의 나이에 20대 선수들과 대결했던 것이 많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야구를 하다가 메이저리그, 일본, 지금 호주에 이르기까지 4개국에서 활동한 기록도 최초라고 알고 있는데요. 도전을 위해 도전에 나섰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 자신을 찾기 위해 도전했다고 할까요? 나이를 떠나서 내가 얼마나 잘 할 수 있나 그것 하나에만 집중을 했어요. 저는 야구선수이고,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야구를 계속하다 보니 끊임없는 도전의 상황이 주어졌던 것 같아요. 지금도 뛰고 공을 던지는 것은 젊은 선수들보다 뒤지지만 야구 요령이나 머리를 쓰는 것 등은 제가 더 잘한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걸 전해주기 위해 또 도전하고 있고요.
Q. 추후 한국에서 야구 지도자로 만날 가능성도 있을까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돌아가 많은 선수에게 저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라고 하는 미국 메이저리그 팀에서도 뛰어봤고, 일본이나 지금 호주에서의 경험도 있고요. 어린 선수에게 제가 가진 역량의 100%를 다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왼쪽부터) 마이너리그 노포크 타이즈 시절,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 입단 후 플로리다 스프링 캠프에서 연습 투구하는 모습.
Q. 프로선수에게 부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텐데요. 부상과 재활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요?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첫 해 뉴욕 메츠에서 활약하던 중 어깨 회전근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었어요.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에도 정상 컨디션을 찾지 못해 마이너리그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었습니다. 사실 그때 그 부상으로 메이저리그 생활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죠. 하지만 그때의 그 뼈아픈 경험 덕분에 지금도 후배들에게 “투수는 피칭 외에 어떤 상황에서도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건넬 수 있게 되었어요.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당시 팀을 이끌었던 랜돌프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저에 대해 “팀의 승리를 위해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던 중 입은 부상이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경기에서 팀이 이겼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제가 이야기했던 부분을 언급했더군요. 감독님께 팀의 승리를 위해 몸을 내던졌던 선수로 기억되어 행복합니다. 그 사건 이후 6개월 가량 재활에 집중했어요. 재활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참 힘들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더군요.
Q. 최근 자전적 에세이 <구대성은 지지 않는다>를 펴내셨어요. 책을 발간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요?
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 평생 야구만 해왔기 때문에 야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자신 있지만 글쓰기는 새로운 분야라고 생각해 못하겠다고 거절을 했어요. 얼마 후 출판사에서 다시 제의하더군요. 가족들은 언제 제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오겠냐며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내게 됐습니다. 책을 쓰는 데만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네요.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를 반복했습니다. 가족들이 과거 기사 스크랩도 함께 찾아주고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Q. 대성불패, 일본킬러, 쿠옹 등 별명도 참 많으신데요. 가장 마음에 드는 애칭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대성불패’죠. 어느 순간 마운드에 서니 ‘대성불패’라고 외치는 함성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어요. 마무리 투수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마운드에 서면 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애착이 가고 들을 때마다 참 기분이 좋습니다.
Q. 회사원이라면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누구나 할 텐데요. ‘내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이 가능할까’ 생각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나이를 떠나서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고 봅니다. 생각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아 후회하는 것보다는 실천하고 거기에 성취감을 더 느낀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전 단 한 번도 제가 야구를 하면서 혹사당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한 이닝이라도 더 던질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한화 유니폼을 벗고 호주프로야구에 진출했던 것도 현역의 연장을 위해서였습니다. 남들은 나이가 많다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도전을 해온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반가운 근황을 전한 구대성 감독.
Q. 최근 코로나 블루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한 불패의 아이콘으로써 한말씀 해주세요.
변화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다음 본인이 좋아하는 걸 찾아보세요. 저는 호주에 있으면서 한국의 트로트 방송을 챙겨보며 힐링을 얻었습니다. 잔디 깎기나 퍼즐 등의 소소한 취미 생활을 통해 일상을 풍요롭게 사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에 머무는 동안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에너지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글 「쇠부리토크」 편집팀
영상 임상현(AT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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