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차선이 모여 최선이 됩니다
유현준 건축가

유현준은 건축계 N잡러다. 건축, 예술, 문화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대중과 눈을 맞춘다. 공간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겐 책을 쓰는 일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모두 건축의 연장이다. 건축을 통해 사람들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눈빛이 빛난다. 알쓸신잡에서 얻은 별명, 셜록처럼.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유현준 교수는 자신이 만든 건축 모형을 가리켰다. 최근 공들인 공모전에서 떨어진 작품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떨어지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며 너스레웃음까지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묘한 자신감이 비친다. 건축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만 같은 그는 자신의 삶에서 ‘좌절’이 성공보다 더 친근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좌절 속에서도 건축을 하는 본연의 즐거움을 누리며 지금도 여전히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쉽게 실망하는 우리에게 성찰의 문을 열어준다.

건축가이면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십니다. 또 방송 출연도 하고 계시죠.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다 연결돼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학생들을 가르치면 생각이 정리돼서 책을 쓸 때 도움이 되고, 책을 쓰고 나면 건축 설계 콘셉트를 잡는 데 도움이 되고, 작품을 설계하면 그 피드백이 제 생각에 영향을 주거든요.

건축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저는 건축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어요. 하기 싫은 일을 제거하다 보니 건축을 하게 됐죠. 건축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성에 잘 맞았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위기가 왔습니다. 건축가가 힘 있는 정치가나 기업가 밑에서 일하는 하찮은 직업인 것 같은 회의가 들었죠. 그래도 마음잡고 공부했는데, 설계사무소에 취직해 일하면서 박봉의 월급에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또 들었죠. 당시 IT 창업 붐이 일어 친구들이 IT 업종으로 진로를 많이 바꿨어요. 그런데 제가 또 그렇게 컴퓨터를 잘하지는 못했어요.(웃음) 그때 바꾸지 않길 잘한 것 같아요.

몇 번의 고비를 넘으면서도 건축가로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건축은 제가 제일 좋아하고 즐기는 일이니까요. 다른 걸 못했을 때는 별로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는데, 그림이나 건축과 관련된 일은 다른 사람보다 못하면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나보다 설계를 못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제가 떨어진 공모전에서 붙으면 자존심이 그렇게 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공모전에 또 나갔죠. 그렇게 하다 보니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은 건축인가 보다’ 깨닫게 된 거예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잠 안 자고 할 수 있는 일은 건축뿐이었어요. 건축이라면 돈은 못 벌어도 월드 클래스를 목표로 큰 꿈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워낙 수상 경력이 화려해 건축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으신 줄 알았는데, 아직도 공모전에서 떨어지신다고요?

지금도 주야장천 떨어집니다.(웃음) 저의 30, 40대는 좌절의 연속이었어요.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죠. 나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건축가가 승승장구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왜 안 되지’ 좌절했어요. 그래도 계속 버텼습니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거든요.(웃음)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원래 글 쓰는 걸 싫어했는데, 원고료를 준다고 해서 신문에 칼럼을 썼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아서 고정 칼럼이 되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책도 냈죠. 덕분에 제 이름이 알려지고 건축가로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됐어요. 인생은 어쩌면 차선의 총합인 거 같아요.

30년 가까이 건축가로 일하면서 건축에 대한 생각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건축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건축가는 관계를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끼리 모여 살면 복잡한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컨트롤하는 하드웨어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건축가죠. 더 나아가 사람들 갈등을 완화해줄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창의적인 솔루션을 제안해서 사람들의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어요.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건축은 단순히 멋진 형태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건축가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됐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원하는 대로 결과물을 만들지 못할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100% 제가 원하는 대로 된 적은 없어요. 그런데 30, 40대를 거치면서 저는 좌절에 익숙해졌어요. 제가 늘 하는 얘긴데, 인생은 차선이 모여서 최선이 되거든요. 제가 만족하는 대로 프로젝트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85점 이상만 되면 그것이 쌓여서 궁극적으로는 더 좋은 방향으로 흐름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가능한 한 제가 올바르다고 믿는 방향으로 결과물을 내기 위해 건축 설계에 반영하고, 칼럼을 쓰고, 방송에서 얘기해서 사회적인 컨센서스(Consensus)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코로나19 이후 우리 모두가 공간이 소중하다는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공간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요?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바뀌었어요. 사람 사이 거리가 멀어지면 공간도 바뀔 수밖에 없죠. 앞으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어요. 제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공간의 양극화예요. 이번 팬데믹을 통해 사람들은 밀도가 낮은 공간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돈이 많은 사람부터 밀도가 낮은 넓은 공간, 상층의 공간을 쓰겠죠. 그러면 남는 공간이 줄어들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오프라인 공간을 차지하지 못해 가상공간, 메타버스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결국 공간의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지겠죠.

직장인들에게는 주거공간만큼이나 사무공간도 중요한데,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무공간은 어떤 형태인가요?

사무공간 자체로만 보면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한 공간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텔레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해 재택근무도 하고, 스마트오피스를 도입해 정해진 자리가 없는 회사도 있죠. 그런데 저는 작더라도 자기 자리만큼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심리적인 앵커(Anchor)로서요.

건축가로서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가 만든 건물을 보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정도면 좋겠어요. ‘저 사람이 만든 건 지금까지 못 보던 건데, 꼭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건물을 설계하고 싶습니다. 해외 여행객이 건물만을 보려고 우리나라에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경우가 있을까요? 제가 설계한 건물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쇠부리토크」 편집팀
사진 김성헌(STUDIO INDIE 203)
영상 정유라(wavefilm)

※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안전하게 지키며 취재 및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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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1. lmj*** 댓글:

    나도 좋은 목표가 있는데 응원합니다.

  2. tae*** 댓글:

    꿈을 이루시길

  3.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