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이었지만 김명곤은 서두르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강하고 굵은 선으로 자신을 표현해낸다. 대하(大河)에 쪽배를 띄우더니 흘러온 인생을 잠시 돌이켜 추억하다가 이내 머리 들어 저만치 먼 뱃길을 응시한다. 아직 못 이룬 꿈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영원한 광대’라고 말한다. 마침 지난 5월에는 국립극장 70주년 기념공연 창극 <춘향> 연출가로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를 27년 전의 <서편제>로만 기억한다는 건, 이미 온당치 않아 보였다.
Q. 대중매체에선 뜸한 편이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무대에서 바빠졌습니다. 4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연극 <흑백다방>에 출연했고 5월에 창극 <춘향>을 연출했어요. 7월 4일에는 다시 예술의전당 <한 여름 밤의 숲속 음악회> 무대에서 노래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나랏일을 떠나고서 고향인 무대로 다시 돌아와 광대로 살고 있습니다. 다시 현역인 거죠.
지난해 예술의전당 연극 <늙은 부부이야기>에서 열연 중인 김명곤. 이 공연은 6월 10일 빛고을아트스페이스 5층 소공연장에서 삭온스크린(SAC on Screen) 프로그램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예술의전당
Q. 영원한 현역으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꿈입니다. 젊은 시절 <꿈꾸는 광대>라는 수필집도 낼 정도였죠. 제 인생은 20대 무렵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왕성하게 진행 중입니다. 주변에서는 허무맹랑하다고 했지만 아직도 갈망이 있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퇴 없이 현장에 남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Q. 불후의 명작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고교 때나 대학(서울대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초기까지는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연극을 알고 나서야 그 동안 알던 괴테, 셰익스피어, 몰리에르가 연극을 위한 문학, 희곡인 걸 알았죠. 괴테는 <파우스트>를 20대에 초안을 만들고 80대가 되어서야 완성했어요. 저도 그처럼 인생을 다 바쳐 완성하는 대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배우로 활동하고, 다음엔 연출가로, 극작가로도 활동했는데, 모두 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를 하면서도 배우는 물론 연출과 감독 일에 관심을 놓지 않았어요. 골고루 다 재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 열 배, 스무 배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망감도 있었지만, 평생 노력하면 되는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현역으로 사는 겁니다.
학창 시절 김명곤은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서양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러다 대학교에 진학해 그의 일생을 구원하는 연극을 만나게 되었다. 연극이 생활 근거지이자 그의 일상의 전부가 될 만큼 그는 온 정신을 연극에 쏟았다. ‘손안의 문학’이 ‘무대의 문학’으로 변했다던 시기가 바로 이즈음. 그러나 너무 과한 열정이 화를 불렀다. 무리한 활동으로 3학년 때 결핵 진단을 받게 된 것. 학교와 연극을 동시에 쉴 수밖에 없었다.
운명처럼 빠진 우리의 소리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담긴 영화 <서편제>. 김명곤은 여기서 각색과 주인공의 아버지 ‘유봉’역(좌)을 맡았다.(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Q. 운명처럼 판소리와 조우한 게 그때였다던데….
우연히 산중의 고요한 정자에서 창 수업하는 걸 봤습니다. 처음 들은 소리와 본 장면에 반해버렸습니다. 돌아와서 판소리 레코드를 듣다가 단가가 가슴에 꽂히는 순간 운명이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투병 중이었고 고향에 내려와 외롭게 지내다 보니 더 사무쳤는지도 모릅니다. 복학하고서 단성사 앞을 지나다 박초월 국악학원엘 들어갔습니다. 없는 돈을 털어 6천 원에 등록을 해버렸고 정식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성악식 판소리를 해대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더 배우고 싶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박초월 선생께 사정을 얘기했더니 장학생으로 계속 배우라고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로부터 10년 간 선생님과 어머니와 아들처럼 끈끈한 사제 간이 됐습니다.
이후 연극판으로 들어온 김명곤은 특히 판소리와 우리 명창, 명인에 관심을 쏟았다. 30대 초반엔 극단을 만들고 활동했지만 20년 가까이 무명으로 지냈다. 그러다 운명처럼 <서편제(1993)>를 만났다. 대중성이나 흥행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실험극이었고, 판소리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일 뿐이었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할 때만 해도 영화가 100만 관객을 모으며 성공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무명에 가깝던 김명곤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그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도 수상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국립중앙극장 극장장과 문화부장관을 지낸 김명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꿈을 좇아 열심히 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생겨난 기회일뿐, 목적한 바도 없었고 다시 할 욕심도 없다”고 말한다.
Q. 2000년부터 국립극장에서 6년간 재임하며 부실했던 극장을 흑자로 돌려놓아 잘한 예술경영의 본보기가 됐습니다. 장관직도 무난히 수행했고요. ‘김명곤 리더십’의 특징이 있을까요?
연극을 오래 하면서 반장도 하고 회장도 하고 극단 대표도 하면서 단체를 꾸리는 일 경험한 게 도움이 됐을 겁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배운 살림살이 능력 같은 정도인 거죠. 국립극장도 그 경험으로 성공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처음 갔을 때 제게 거긴 천국이었습니다. 그런 좋은 시설에 왜 부실한 부분이 있는지 이해가 안 돼서 개혁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독선적으로 혼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정과 꿈을 공유하고 함께 가는 걸 원칙으로 했습니다. 테크닉만으로 될 일은 아니더군요.
김명곤은 내가 스스로 먼저 준비해야 한다는 자세로 인생 2모작을 일궈가고 있다.
Q. 자기 인생을 리드하는 리더십은 어때야 하나요. 인생 2모작을 위한 준비, 새로운 리더십으로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제가 자주 받는 질문이 김명곤은 연출가냐 배우냐 극작가냐입니다. 저는 배우이며 제작자이며 연출가이기도 하고 기획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꾸 묻습니다. 하나로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직업란에 써넣을 무엇 하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변호사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사회가 한 사람의 능력을 직업이라는 분류에 집어넣으려 하는 건 안 좋은 습성 같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규정하면 잘 돼봐야 딱 그것밖에 안 됩니다. 자신의 재능과 하고 싶은 일을 하나로 규정하려 들지 말고 열어두고 꿈꾸면 좋겠습니다. 물론 꿈만 꾸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싶은 일이 있다면 10년 정도 투자한다는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의 재능을 배우로만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는 남이 불러주는 직업이니까 안 불러주면 실업자니까요. 남이 안 불러주면 내가 작품을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이 부르기 전에 내가 스스로 먼저 준비해두자 생각해 기획도 하고 연출도 하고 글도 쓰는 걸 배웠습니다. 은퇴 후 인생 후반기가 30년입니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해나가는 시대입니다.
Q. 막연한 불안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 바로 서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저는 꿈과 열정이 있는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에 미쳐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겁니다. 오래 꿈꾸던 큰일이든 하루하루의 소박한 일상이든, 자신을 바치고 심취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게 행복입니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스스로 열정을 바치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는 인터뷰 때마다 자주 인용하는 서편제 대사를 여기서 또 꺼냈다. 영화 속 소리꾼이자 비정한 아버지인 ‘유봉’이 아들에게 호통치는 대목이다.
‘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속판이여, 이놈아!’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미치지 않고는 무언가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술인이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돈 못 벌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세계에 미쳐 꾸준히 하다 보면 행복이 그 속에 담겨 있다는 것.
Q.이름이 계속 남는다면 어떤 한 문장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그냥 한 줄로 ‘미친 듯이 놀다 간 사람, 김명곤!’이면 좋겠습니다.
글 「쇠부리토크」 편집팀
사진 이보영(록 스튜디오)
영상 팀바른
사진제공 다음영화, 예술의전당
멋있네요
굿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기사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