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鐵(문사철철)
문학, 역사, 철학은 인문학 필수 분야. 현대제철인의 교양과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철로 풀어본 인문학을 연재한다. 이름하여 文史哲鐵(문사철철)!
현대미술의 재료와 제작 방식은 지난 세기에 걸쳐 한껏 자유로워졌다. 그중 산업 재료로 가공된 철은 전통적인 미술의 형식을 바꾸고 새로운 현대미술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역할이 컸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는 철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 생산 현장에서 연금술적인 창작의 동력을 지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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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공소 옆 작업실
을지로 뒷골목, 최근 재개발이 시작되고 있는 오래된 철공소 골목은 미술가들의 또 다른 작업실이다. 각종 재료 및 공구상과 철공소가 즐비하고 철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자들이 그곳에 쇳가루로 다져진 단단한 터를 닦아 놓은 덕분이다. 날카로운 기계음과 용접 불꽃이 내뱉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한 풍경이지만, 이 골목길 안팎에는 미술가들의 스튜디오가 밤과 낮을 나누어 쓰듯 공존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찾고 있는 미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50년대 산업 발전의 씨앗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을지로 철공소 골목이 이후 국가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미술가들은 그 곁에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실현해왔다.
물감이나 자연의 흙, 나무, 돌, 금속 같은 전통적인 미술 재료 대신 산업 재료와 산업적 제조 방식을 활용한 시도는 현대미술에서 강조하는 새로운 “태도”를 모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전환점이 되었던 현대미술의 특징을 우리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에서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규격화된 금속 재료로 “삼차원의 사물” 탄생
1960년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각 예술에서의 미니멀리즘 경향은 형식에서 최소한의 “기초적 구조”를 추구하면서 이를 산업 재료와 산업적 제조 방식을 통해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조형 운동을 내세운 전시 ⟪기초적 구조들(Primary Structures)⟫이 1966년 뉴욕에서 열렸다)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젊은 예술가들은 나무 합판이나 금속 철판처럼 규격대로 대량생산된 산업 재료를 미술의 재료로 가져다 썼다. 그들은 작품 제작 과정에도 산업 현장 기술자들의 제조 방식을 참조했다.
Donald Judd, Untitled, 1966(사진 출처: 저드파운데이션 홈페이지)
예컨대,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작가로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가 있다. 그는 미니멀리즘 미술의 형식적 특성을 새롭게 구축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작가 중 한 명이다. 특히 저드는 규격화된 금속 재료를 탁월하게 다루었다. 금속 구조물의 표면에는 물감 대신 래커(Lacquer)나 에나멜 물감 등 산업 도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조각가의 손의 흔적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전통적인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처럼 저드는 미술 재료와 제작 방식의 변화를 동시에 꾀하며 궁극적으로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저드는 자신의 작품을 미학적 범주에 넣지 않았다. 대신 의도적으로 “삼차원”이나 특수한 “사물”로 이름 지어 불렀다.
“삼차원”의 “사물”로 특정된 기하학적 금속 구조물에서 우리는 현대미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당대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더이상 미술 작품을 일상과 구분되는 초월적 가치로 보지 않았다. 또한 예술가를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대신 저드의 사례처럼 규격화되어 대량 생산된 재료를 사용해 ‘작가의 손의 흔적이 배제된 비개성적 특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저드는 자신의 모든 작품 제목을 “Untitled(무제)”로 표기하여 비개성적인 금속 구조물이 주는 공허함을 더욱 강조했다. 전문 기술자들과의 협업도 모색함으로써 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원본으로서의 가치마저 부정했다.
철의 연금술적인 물성이 촉발한 색다른 관람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관람자가 물리적 공간 속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무언가를 깨닫는 실재적인 효과를 기대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간 속에 배치된 미니멀한 형태의 구조물들이 내뿜는 변화이며 이를 지각하는 관람자의 연극적 경험이다.
Donald Judd, Untitled, 1963(사진 출처: 저드파운데이션 홈페이지)
저드는 이 미니멀리즘의 경험을 전통적인 미학적 경험과 대립시켰다. 전통 회화나 조각에 대한 숭고한 초월적 경험의 가치를 삼차원의 사물에 대한 관람자의 신체적 경험으로 대체하려는 의도를 과감히 드러냈다. 저드는 <무제>(1963)에서 도금된 철과 알루미늄을 나무 합판의 규격에 맞춰 부착하고 표면에서 보이는 각 모듈의 반복적 구조를 강조하려는 듯 붉은색 도료로 표면을 마감했다. 언뜻 회화 같기도 하고 부조 같기도 한 이 작품은 금속판의 표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회화와 조각을 산업용 금속 재료와 그것의 가공법으로 대체시켜 놓았다.
Donald Judd, Untitled, 1989(사진 출처: 저드파운데이션 홈페이지)
그는 간혹 도금하지 않은 강철판으로 정육면체를 제작하기도 했다. 철이 공기 중에 산화되는 특징을 살린 작품은 서서히 녹슬고 마모되어 변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더 나아가, 작품을 둘러싼 삼차원의 물리적 환경이 작품의 정체성을 특정하며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강철 예술을 꽃 피워낸 철의 조각가 리처드 세라
포스트 미니멀리스트로 불리는 동시대의 작가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8-) 역시 비슷한 태도를 공유했다. 그는 “철의 조각가”로 불리울 만큼 주로 강철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해 왔다. <쌓아 올린 철판들(건물 해체용 철구) Stacked Steels Slabs(Skullcracker Series)>(1969) 같은 초기 작업부터 그의 시그니처 작업으로 알려진 녹슨 철판을 사용한 <이중 회전력 타원 Double Torqued Ellipse>(2003-2004)을 떠올려 볼 만하다.
ⒸDamira(shutterstock.com)
세라는 공기와 비와 바람 등 자연환경에 의해 녹슨 철판을 가져다 건축적 스케일의 구조를 만들어 관람자로 하여금 철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물리적 경험을 제안한다. 그의 작품은 철의 강렬한 물성과 그것의 건축적 쓰임을 활용해 전문가들과 협업하면서 시각 예술에 대한 경험을 단순히 시각에 의한 미적 체험에만 두지 않는다. 대신 공간 및 환경 속에서 신체적 경험을 통해 일련의 시각과 지각적인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확장된 장”을 제공한 셈이다.
이처럼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은 미술의 확장을 꾀하면서 재료에 큰 변화를 겪어왔다. 산업 재료로서 “철”이 가진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특성들. 그 특별함이 지금까지 현대 미술가들의 창작 동력으로 작용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글_「쇠부리토크」 편집팀
사진 출처_구겐하임미술관, 저드파운데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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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하지만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