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모델을 만들면서 스트레스를 잊죠”
당진제철소 철근압연부 이현승 사우

이현승 사우의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프라모델보다 먼저 눈에 띈 건 고양이 두 마리였다. 낯을 가려 숨어버린 고양이까지 총 3마리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이현승 사우는 “고양이들이 프라모델을 넘어뜨리거나 부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그래도 어쩌겠어요? 걔들이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세밀하고 정교한 취미를 가진 사람은 날카롭고 예민할 거라는 편견은 이현승 사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라졌다. 딸아이 친구의 애타는 눈빛을 모른척할 수 없어 수개월 동안 만든 프라모델을 넘겨주면서 혹시 건강에 해로울까 봐 도색작업 하지 않은 것들로 골라주는 배려와 센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이현승 사우의 작업실은 건담 등의 프라모델로 가득하다.

 

Q.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당진제철소 철근압연부 교대 계장을 맡고 있습니다. 압연파트는 4조 3교대로 운영되는데 조마다 계장, 운전공, 주임, 검사공 등 6명이 함께 8시간씩 교대 근무를 합니다. 운전공으로 10여 년 동안 일해왔고 지금은 교대 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사내기자단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해요. 쉽게 말해서 총무일인데 회비를 걷어 좋은 일에 쓰기도 합니다. 최근 노인요양복지 단체인 송산 마실터와 협약을 맺고 봉사활동을 추진하고 있죠.

Q. 프라모델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들어봤습니다. 그때 만든 작품은 군인 모형으로 1/35스케일(3~4cm)이었죠. 밀리터리 계열의 프라모델로 입문해서 군인, 전차 등을 만들었습니다. 밀리터리는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더 만들 게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건담으로 옮겨갔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도 만들다가 군대에서 손을 놨고 제대 후엔 IMF가 터지는 바람에 금전적인 문제로 프라모델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결혼하고 아이도 키우면서 한동안 잊고 있다가 15년 전 다시 시작했죠.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시작한 프라모델 덕분에 이현승 사우는 업무의 피로를 잊는다.

 

Q. 15년 전 다시 프라모델을 시작한 계기는요?
입사한 지 10년이 좀 넘었을 때였는데, 슬럼프가 왔어요. 업무와 제 미래에 대한 생각들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엉뚱하게 “로봇이나 다시 만들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 일로 힘들어도 다음날이 휴일이면 쉴 수 있어 괜찮잖아요? 그런데 다음날이 휴일이 아닐 때는 집에 들어와서 10~20분 동안 프라모델을 만지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고 열도 식어요.

그때 제가 운전공이었는데 운전공은 업무 강도가 심합니다. 종일 압연 계기판을 보면서 운전하는 사이사이에 타 부서나 현장으로부터 무전과 전화 연락을 수시로 받아야 하고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나가서 해결해야 해요. 프라모델을 만들면서 업무 피로가 풀렸죠. 만드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거든요. 또 프라모델 만드는 일은 작은 부속 하나하나를 맞추는 일이라 하다 보면 집중력이 높아져요. 그 집중력이 업무로 이어져 계기판도 잘 보고, 모터 소리가 이상하다든가 할 때 예민하게 잘 잡아냅니다.

Q. 프라모델 만드는 게 업무에도 도움이 되는군요. 그 외에 프라모델 취미의 장점이라면?
대부분의 건담 모형이 일본에서 제작되니까 설명서도 일본어로 되어 있어요. 덕분에 독학으로 일본어를 좀 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 취미가 돈이 꽤 들어요. 비싼 건담은 60~120만 원까지도 해요. 그러다 보니 아내에게 받는 용돈만으로는 취미생활을 하기가 부족해서 회사에서 품질 개선 제안서를 열심히 썼어요. 채택되면 보너스를 주고, 분임 토의도 잘하면 시상금이 있거든요. 그런 부수입들을 모아서 건담을 사죠. 회사를 위해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겠죠? 하하.

가장 큰 건담 프라모델을 만들려면 무려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Q. 키덜트의 취미생활 때문에 부부 싸움이 잦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부인께서 잘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요.
네, 대학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제 취미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해해줍니다. 아내보다는 딸이 어릴 때 안 좋아했죠. 아빠가 맨날 집에 틀어박혀서 자기랑 안 놀아주고 프라모델을 만들고 있으니까 훼방 놓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 커서 각자 취미생활을 하고 있어요. 작업실로 쓰는 이 방도 원래는 딸 방이었습니다. 딸이 대학 가는 바람에 제 작업실이 되었죠. 사실 아내도 바비인형 수집하는 취미가 있고, 딸도 한때 베어브릭을 갖고 놀았습니다.

이현승 사우는 건담 프라모델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라모델은 대체로 밀리터리와 건담, 피규어로 나뉜다. 건담의 등급은 사이즈별로 HG, MG, PG로 나뉘며, 가장 큰 PG의 경우 부속 수가 1500~2000개 정도라고 한다. PG등급의 프라모델 하나를 조립하는데 최소 6개월이 걸린다. 지금 이현승 사우의 책상에 놓인 건담 같은 경우는 1년째 개조를 하는 중이다.

프라모델은 조립뿐 아니라 도색도 하는데, 부속을 떼기 전에 전체를 스프레이로 착색하고, 세세한부분은 아크릴 물감을 붓으로 칠한다. ‘웨더링’은 사용한 것처럼 보이게 도색하는 것을 뜻한다.
프라모델 쪽에서 쓰는 은어들도 재미있다. 모형 총을 만드는 사람들을 ‘건더기(Gun+덕후)’라 부르고, 오래된 프라모델 조립품을 ‘구킷(舊+Kit)’이라고 하는데 구킷은 ‘낙지’라고도 불린다. 오래되다 보면 낙지처럼 흐물흐물해져서 그렇게 부른다고.

“프라모델을 하나의 취미생활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동심을 갖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요.”

 

Q. 프라모델 동호회 활동은 하시나요?
안타깝게도 당진 쪽에는 프라모델 동호회가 없습니다. 천안만 해도 프라모델 공방을 운영하시는 분이 있어서 도색 부스를 만들어 빌려주기도 하는데 아쉽죠. 그래서 저는 주로 네이버 밴드로 활동합니다. 밴드에서 정보도 나누고 완성된 조립품 사진을 찍어 올리고 합니다.

일전에 당진에서 어떤 초등학생이 건담을 쥐고 뛰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너 이거 어디서 났니? 직접 만들었니?”라고 물어보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습니다. 제가 당진에 처음 내려왔을 때는 프라모델 가게가 있었는데 곧 없어졌어요. 당진문화원에서 프라모델을 주제로 강연을 한 적도 있는데 가보고 싶었지만 교대근무 하느라 못 갔습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당진에 있으면 좋겠어요.

Q. 프라모델에 취미를 붙이려는 분들에게 조언 한마디 해주세요.
보통 프라모델에 빠진 분들은 처음에 싼 것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눈이 높아져 좋은 것을 찾게 돼요. 그런 분들은 프라모델에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프라모델을 처음 만들 때 좋은 것으로 시작하세요. 제대로 된 것으로 시작해보면 내가 여기에 취미가 없구나, 취미가 있구나 하는 걸 단번에 가름할 수 있어요. 취미가 없는 경우 미련이 생기지 않아 빠져나오기도 훨씬 쉽습니다.

작은 프라모델 부속들을 맞추면서 키운 집중력은 업무 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저에게 프라모델은 장난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취미이자 자산입니다. 프라모델 덕후 중에는 공방을 차리고 제품을 의뢰 받아 작업하는 분들도 있고, ‘도색하는 미녀’ 같은 유명 유튜버도 있습니다. 프라모델을 장난감으로 여기지 말고 당당한 취미생활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른이 되어 아직도 동심을 있다는 것 자체로 좋지 않나요?

「쇠부리토크」 편집팀
사진 김대진(지니에이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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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1. 대박이네요!!

  2. 멋지시네요~~!!
    남는거하나만주세요~~ ㅋㅋ

  3. 첫번째 사진보고 놀랬네요! 현대제철 진성 덕후로 임명합니다! 좋은 기사 잘보고 갑니다^^